브랜드와 타이틀
현대 사회는 무지막지 복잡하고 전문화/세분화 되어 있지요. 일개 개인이 다방면을 일일이 따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선택과 판단에 있어 브랜드 신뢰성을 활용합니다. 적어도 이만한 브랜드라면 이 정도는 되겠지, 하고.
개인의 소비재 관점에서 브랜드는 거의 온전하게 유효합니다. (아주 몹시 특이한 사례들도 없잖아 있습니다만) 브랜드의 입장에서 시장 신뢰를 팔아 치우는 것은 너무 값비싼 선택이며, 대체로 많은 의사 결정자들이 엮여 교차로 검증하기 때문에 단기적 이익을 위해 영 엉뚱한 선택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개개인을 상대해야 하는 인력 풀의 경우에는 이런 브랜드 타이틀이 온전하게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브랜드 타이틀이 가리키는 방향도 분명히 있으나 막연한 기대로 역선택의 우를 범한다 하겠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 크고 유명한 회사 조직의 커리어를 가졌다는 것이,
그 개인이 더 높은 역량을 발휘한다는 보장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 — 그런 타이틀의 임원/아이콘을 내세우는 조직이,
꼭 더 나은 조직일 수는 없습니다.
이게 참, 어려운 역선택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 잘/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둬 본 대기업 출신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역량/성품이 있다고 합니다. 음… 그렇게 많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시스템 안에서 부품의 역할만 맡아 본, 큰 조직 출신보다 온갖 실전 뒤치닥거리를 겪어 본 작은 조직 출신 커리어가 낫다고도 합니다. 딱히 벗어나는 말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없는 주제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에? 이런 문제입니다:
첫째. 공부를 잘,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둬 본 사람이 보통 더 성실하고 머리도 좋다 — 는 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성적에 대한 선이 각각 사람마다 다른데, 보통은 자신이 받아 봤던 성적이 그 기준이 됩니다. 학창시절 성적의 중앙값을 대략 수능 성적 기준으로 인서울(?) 정도로 잘라 봅시다. 경계선 위아래로 개개인의 지능과 성실성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개개인을 판단할 근거가 될 정도는 아닙니다. 경험적으로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만 대기업 공채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일종의 인재상이 있긴 합니다. 엄밀히 말해 추구한다기 보단, 브랜드를 갖춘 큰 조직에서 많은 지원자 가운데 대량으로 사람을 뽑다보니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성인데… 간단히. 분란 만들지 않고 시킨 일 적당히 잘 할 사람. 입니다.
좀 건조하게 풀자면. 그래서 역량이 너무 뛰어나 튀는 사람, 너무 성실해서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만들어 올 사람, 너무 창의적이어서 조직에 순응하지 못할 사람. 은 전부 걸러낼 대상이란 의미입니다. 뛰어나서 잘려요? 성실해서 잘린다고? 네 그렇습니다. 공채 심사로 들어가 본 분들 다들 적어도 하나씩은 기억 나는 장면 있지요? 왜, 말 안 들을거 같다 / 분란 일으킬 것 같다 / 몸 값 비쌀 것 같다 / 금방 도망칠 것 같다는 이유로 자른 구직자가 각자 한 다스 씩은 되지 않습니까? 아닙니까?
둘째. 통계적으로 큰 조직의 부품에 비해 작은 조직에서 산전수전 겪어 본 사람이 낫다 — 도 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 또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있어도 판단 근거는 안 됩니다. 일단 큰 조직이건 작은 조직이건, 프로세스를 그려가며 비즈니스를 파악하는 역량 — 흔히 이야기하는 일머리의 일종인데 — 을 가진 사람 자체가 드뭅니다. 대체로 큰 조직에서만 머무른 경우 커리어 중에 시스템 외적 경험 자체가 원천 차단되어 아예 감을 못 잡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
그건 그런데, 조직 규모를 막론하고 그 경험/체감을 갖춘 것과 자신의 관점/해석을 갖는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게다가 대기업 조직이라고 꼭 큰 조직 성격으로 구성되지도 않고, (벤처/스타트업이 아닌 이상에야) 중소/중견 기업 정도 되면 딱히 작은 조직이 아닌 경우도 허다합니다. 덧붙여, 큰 조직에서 전략회의에 자기 자료 들고 들어갈 레벨이 되면 작은 조직에서는 불가능한 경험이 가능합니다.
셋째. 이게 제일 큰 문제이긴 한데. 채용하는 입장에서 필요한 인재상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타겟이 구체적이지 못하니 막연한 브랜드에 기댄다는 의미입니다. 나 스스로를 포함해서 — 역량/태도/성향 그 어느 쪽이던 대충이라도 스펙트럼상 한계치를 설정해 놓고 면접 들어가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못 봤습니다.
넷째.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의 조직에서 어떤 경험/선택을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조직의 이름값 같은건 (웬만하면) 지우고 봐도 됩니다. 이력서에서는 S사 전략기획실과 중견+ 기업의 사업 기획 조직 경험을 온전히 동등하게 봐도 무방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조직에 들어간다는 선택의 이유가 있겠지요. 그런 조직에서 활동한 경험과 동기가 있을 겁니다. 또 그런 조직에서 나올 원인도, 있을 겁니다. S사 전략 기획실 같은 타이틀에 눈을 흐리면 그 순간에 가장 필요한 쟁점을 놓치는 겁니다. 무엇을 경험했나? 왜 그런 선택을 했나? 그 경험과 판단, 선택에 기반해 보았을 때, 이 사람의 역량/성향/가치관은 무엇인가? 면접관에게 가장 필요한, 그러나 실제 면접장에서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든, 질문들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채용의 관점에서 보았으니 이제 구직의 입장에서 좀 더 쓴 소리를 이어가 볼까요.
중견기업 이상 큰 회사는 대부분 일정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고, 그 안에서도 여러 선택의 경우가 있으니, 자리를 구하는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낫습니다. 뭐 정 뭣해도, 월급 밀리거나 떼어 먹히진 않잖아요? 막말로 돈이라도 많이 주긴 하고. 일반론 케바케 사바사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 숫자가 훨씬 더 많고 비교적 문턱이 낮은 중소/벤처/스타트업 인데요. 숫자가 많은 만큼 다양한 판단의 기준들이 있는데 — 미안한 말이지만 /유명 대기업 출신/ 임원을 홍보하는 스타트업은 그 홍보 자체를 위험 신호라 봅니다.
하나. 대기업 출신이라 치고, 언제/왜/어떻게 나왔습니까? 전략회의에 들어갈 레벨 — 임원 혹은 임원 바로 밑의 실무 책임자— 외에 사업 관점에서는 딱히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가령 식당을 차리는 문제로 봅시다. 7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샐러드 재료 손질 부문의 최고참 출신 vs. 동네 레스토랑에서 꼬박꼬박 운영회의 들어가고 메뉴 구성에 골머리 좀 썩혀 본 부주방장 출신. 어려운 문제입니까?
본래 갖고 있던 사업을 여하의 이유 때문에 따로 들고 나와서 차린 경우가 아니라면, 또는 실제 전략 구상에 참여하면서 사업적 경험/체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흘러간 사업 경력은 (크던 작던) 똑같이 0으로 똑같습니다.
예의 그 홍보 멘트를 좀 모질게 풀어보자면 얼추 이렇게 봅니다:
7성급 호텔 레스토랑 (홀 서빙 매니저) 20년 경력 오너 쉐프의 국밥집
네, 동네 맛집 부주방장 출신이 평균적으로 나을 수 밖에 없지요.
둘. 사실 이 글의 발단이기도 한데… 세간에서 흔히 대기업 브랜드/만/ 앞세우는 사람들 특유의 독성이 좀 있습니다. 그건 정말 Toxic 하다고 밖에 못하겠습니다. 글쎄요, 정년 퇴직할 나이가 되어서까지 S대 입학이 일생 최대 유일의 자랑인 Toxic 함이라 할까요.
대개 브랜드 파워가 약할 수 밖에 없는 중소/스타트업은 대표를 포함한 주요 인물들과 그들의 경력을 내세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괜찮은 경우라면, 보통 핵심 인물들의 업무/사업에 관련된 경험/경력과 인맥, 성과를 부각시킵니다. 사업이 그런 요소들을 중심으로 굴러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원래 대기업에서 비슷한 사업을 하다 들고 나와서 차렸다, 혹은 어떤 식으로든 관심이 생겨서 고민하고 연구한 끝에 대기업의 이런 업무 경험을 접목해서 차렸다.
후자는 좀 약하긴 하지요.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업무 경험, 연관성에 대한 고민 없이 무작정 대기업 브랜드만 내세우는 경우를 말 합니다. 좀 심하게 Toxic 해지기 시작합니다.
면접자(기업)와 구직자(개인)의 입장을 딱 반대로 뒤집어 봅시다. 면접자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어떤 역량을 갖고 있는가(기업 업력), 어떤 성향인가 (조직 문화), 무엇이 현재 조직과 잘 맞고 어떤 걱정이 있나(비전/적응)? 같은 질문을 하지 않겠습니까. 합리적인 경우라면 말입니다.
당신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저는 S대를 졸업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어떤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
“저는 S대에서 공부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기대를 갖고 있습니까?
“저는 S대 출신으로서…”
…될까요? 면접자라면, 뽑겠습니까? 심지어 어느 정도 성적인지도 없어. 이 와중에 뽑는 사람들도 있긴, 해요. 참…
되짚어 물어 본다는건 이런 겁니다: S대 출신이 왜/어째서/어떻게 이 자리에 왔습니까?
이 관점에서 — 대기업에서만 일정 경력을 쌓았지만 책임자 직급까진 올라가진 못한 상태로, 승진에서 밀렸다거나 조직 내 갈등이 있거나 하는 이유에서, 시장 가치와 사업 구조를 헤아리지 못한 채 충동적으로, 별 계산 없이 그럴듯한 신사업에 뛰어 드는 경우는 대체로 문제가 됩니다. 각자 맡은 바 일만 잘 하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만… 많은 경우 대기업 브랜드란 비대한 자아와 아무 손 쓸 도리 없는 현실이란 모순이 한 몸에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를 불러 옵니다.
왕년에 뭐가 있던 할 일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됩니다. 몸을 움직일 일이 많으면 잡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습니다. 크던 작던 일을 지속하면 어쨌든 일은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그걸 어떻게 키워 가는지가 사업가로서의 역량이겠지요.
그런데 당장 손 댈 수 있는건 없고, 그렇다고 모양 빠지게 뭘 거들 수도 없다면. 일은 일대로 버려지고, 계산은 계산대로 틀어지고, 잡생각만 계속 듭니다. 그냥 잡생각이면 차라리 다행인데 — 불안과 자기연민이 뒤섞인 잡생각이 들죠.
괜히 나와서 고생할 바에야 눌러 앉아 있을걸.
겨우 이 정도 자리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
겨우 그 정도 자리조차 자신의 손으로 온전히 만들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불안이 현실화 할 무렵이면 결국 가까운 사람들(고용인)만 철저하게 괴롭히고, 그 수준이란 일반적인 통념을 가볍게 넘어섭니다. 그러니 구직자 입장에서는 위험 신호라 말 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잘 풀리기도 힘들고, 풀려도 더 큰 문제를 불러 옵니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자아만 더 커지거든요.
그런 경험/상태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들이 있긴 한데, 어느 정도는 겪어 봐야 알 수 밖에 없는 미묘한 지점들이라 글로 남겨두긴 위험하겠네요. 비정상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다는 정도로 줄이겠습니다.
기업/조직이나 개인으로서, 혹은 상품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브랜드에 대해 갖는 생각들은 있습니다. 적어도 상품이나 서비스의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 브랜드 신뢰성은 어느 정도 유효합니다. 같은 관점을 기업, 채용이나 사업의 입장에서 서 보더라도 — 일반 소비자 입장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브랜드 신뢰성은 있다고 봅니다.
다만,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브랜드 타이틀만이 엉뚱한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면, 그래야 할 만한 이유가 있겠구나 — 가리고 싶은 다른 무언가가 그 뒤에 있겠구나, 생각할 뿐 입니다. 그만한 이름 값이 붙어 있는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어느 쪽으로든 말입니다.